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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이 입적하시다



올곧은 수행자로, 영혼을 깨우는 문장가로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졌으며, 맑고 향기롭게. 청빈한 삶과 수행 정신의 사표였던 법정 스님이 11일 열반에 들었다.



법랍 반백년이니 승속의 경계에서 무애가(無碍歌)를 부른 듯 누가 타박을 놓으련만, 꼬장꼬장 미간을 구기며 안경 너머로 쏘아내는 눈빛은 그 자체로 늘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었다. 종신토록 여법한 수행자였다. 사람들은 그의 삶과 문장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흔히 수정에 빗댔지만, 기실 그것은 오동지섣달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같은 것이었다. 스님은 그리 살다 그리 먼저 언덕을 넘어갔다.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 수행자였을 것이다."



스님은 1932년 2월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태어났다. 속가 성은 박씨. 개명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열여덟 나이에 한국전쟁과 맞닥뜨렸다. 죽음과 삶이 무연히 교차하는 아수라장을 겪은 섬세한 영혼은 결국 스물둘에 먹물 옷을 입는다. 훗날 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한 핏줄, 같은 이웃끼리 총부리를 마주대고 미쳐 날뛰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 마주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워 묻고 또 물으면서 고뇌와 방황의 한 시절을 보냈다."



집을 나온 스님은 오대산으로 향했으나 눈으로 길이 막혀 서울 안국동 선학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서 당대의 선지식 효봉(1888~1966) 선사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절집이나 세간이나 가난과 번뇌가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하루 두 짐씩 나무를 해다가 아궁이에 불 지피는 것이 스님의 수행이었다. 무소유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양태로 그의 몸에 각인됐다.



스님은 그렇게 법을 참구하는 납자이고자 했으나, 그의 글재주는 먹물 잠상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종단은 책을 펴낼 일 있을 때마다 그의 손을 빌렸다. "원고지 칸을 메우는 업"으로 스님은 종단 안팎에서 이름을 얻게 된다.



"비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는 집을 세우라"



1970년대는 산문 속에 혹은 지면 속에 날카로운 문장으로만 있던 스님을 저자로 끌어내렸다. 민주화에 앞장선 인사들과 교류하며 이런저런 반독재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기관원이 스님의 곁을 맴돌았고 어용화된 종단은 그를 무슨 보균자 취급하듯 했다. 이판과 사판이 둘이 아니라는 믿음이 스님을 누구보다 꼿꼿한 투쟁가로 비쳐지게 했다.



그러나 1975년 그는 다시 걸망을 지고 산으로 향한다. 그 해 봄 인혁당 사형 집행이 결정적이었다. 분노와 자책이 함께 닥쳐왔다. 적개심을 품었다는 사실이 수행자로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스님은 훗날 이렇게 얘기했다. "불이 나면 내남없이 모두 나서서 불을 꺼야 합니다. 하지만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제 삶의 몫을 해야 합니다."



"마음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바늘 틈도 없는 원칙주의에 깔깔한 성격. 법정 스님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다. 그의 글에선 무른 습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의 고승 경봉(1892~1982) 스님은 법을 묻는 제자에게 "야반삼경에 문빗장을 만져 보거라"라고 말했다는데, 법정 스님의 글은 종이에 새긴 차가운 쇳덩이 같았다.



삶은 더했다. 세상이 추켜세울 때마다 그는 토굴을 짓고 산으로 들어갔다. 1996년 고급 요정이던 서울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주 받아 길상사를 창건했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홀로 강원도 산굴로 들어갔다.



'혼자 이런 산중에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어떤 틀에도 갇힘 없이 내 식대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만약 시끄러운 세상에 살면서 직업을 선택하게 됐다면, 청소차를 몰거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일을 하게 됐을 것이다. 청소차를 몰고 다니면서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을 대하고 있으면, 절이나 교회에서 행하는 그 어떤 종교 의식보다도 훨씬 신선하고 건강하고 또한 거룩하게 느껴진다. _중략_


거처를 강원도의 한 두메산골 오두막으로 옮겨 왔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서 묵은 둥지에서 떠나온 것이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문 두드리는 사람이 없어 지낼 만하다.


내 오두막의 둘레는 요즘 하얀눈이 자가 넘게 쌓여있고 청냉한 공기속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처마끝에 달아놓은 풍경이 이따금 지나가는 바람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소리뿐이다.


_이하생략_


이 글은 93년도에 출간된 '버리고 떠나기' 법정 隨想集의 <책머리에> 있는 글이다.



비우고 버리고 낮춰야 행복할 수 있다는 ‘무소유’를 역설해 현대인을 깨우친 법정스님,


내 것이라고 남은 게 있으면 맑은 사회 구현에 써달라고 하신 불교계의 큰 어른은 가셨다.



현재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한 산중의 水流山房에 머물고 있다고 하신 스님의 저서로는



<텅 빈 충만> <서 있는 사람들> <영혼의 母音> <無所有> <말과침묵> <산방한담> <물소리 바람소리>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등이 있고


불교성전을 엮어 내기도 했으며, 譯書로는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진리의 말씀(法句經)> <불타 석가모니> <숫타니 파타> <因緣 이야기> 등이 있다.




                                                                      2010년 3월 12일 새벽 2시


                                                                       법정스님을 생각하며 송샘